지난 주 칼럼에 “배웅”이란 제목으로 ‘자식을 정서적으로 배웅하자’는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어서 인생에서 마중해야할 것들에 대해서 쓰려고 합니다. 배웅과 마중은 정겨운 순 우리말입니다.
5일간 난생 처음 낯선 곳으로 장거리 여행을 했던 아들은 견문을 넓히고 잘 도착했습니다. 대학 탐방도 물론 했지만, 휴스턴서울교회의 청소년 목장과 주일 youth예배를 참석하고 도전을 받았다고 합니다. 고등학생 각 학년으로 구성되어 있는 목장에서 좋은 친구들도 만나고 일주일에 한 번씩 가정에서 진솔한 나눔을 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 교회도 청소년 목장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한창 무뚝뚝할 틴에이져들이 밝고, 찬양을 부를 때에도 큰 소리로 노래하는 뜨겁고 적극적인 신앙모습에 도전을 받은 모양입니다. 돌아오는 항공편을 Salt Lake city에서 갈아탔는데 그만 첫 번째 비행기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밤 9:30 비행기를 놓쳐서 11시간을 공항에서 기다렸다가 다음 날 아침 8:30 비행기를 타고 PDX에 도착했습니다. 인생은 항상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과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포틀랜드에 도착하는 녀석의 얼굴이 마중 나간 제 눈에는 한층 더 성숙해보였습니다.
‘마중하다’는 단어에는 적극적인 사랑이나 관심이 배어있습니다. 그냥 자기 자리에서 기다리면 편하겠지만 마중을 나가면 오는 사람이 위로를 받습니다. 집을 나간 탕자를 기다리던 아버지는 먼발치에서도 아들의 모습을 알아채고 그대로 달려 나가 마중합니다. 성경에는 없지만 맨발이나 버선발로 달려갔을 것 같습니다. 크리스천들의 삶 속에서도 은혜를 마냥 기다리지만 말고 내가 먼저 은혜의 자리로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국빈이 방문하면 국가 원수가 친히 활주로까지 마중을 나가는 게 예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때 마중을 나가야 합니다. 지하에 아무리 시원한 물이 콸콸 흘러도 펌프에 마중물 한 바가지는 내가 부어야 물이 올라옵니다.
가곡 중에 ‘마중’(허림 시, 윤학준 곡)이란 곡이 있습니다. “사랑이 너무 멀어/ 올 수 없다면 내가 갈께... 사는 게 무언지 하무뭇하니/ 그리워지는 날에는/ 그대여 내가 먼저 달려가/ 꽃으로 서 있을게” 이란 노랫말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다정하게 다가와주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다정하게 다가가는 마중의 영성이 성도에게 필요합니다.
인생에는 싫은 손님이든 좋은 손님이든 마중해야할 것들이 많습니다. 중년의 나이, 노년의 나이, 그리고 인생의 끝도 갑자기 들이닥치도록 하지 말고 미리미리 용감하게 마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사명이 달갑지 않아도 결국 내 코앞까지 찾아오도록 하지 말고, 내가 먼저 자원하는 기쁜 마음으로 마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