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젊을 때에는 모든 것이 명확합니다. 옳고 그른 것이 분명하고, 선한 사람 악한 사람 구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분명했던 흑백 논리가 회색으로 변합니다.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고, 모든 의견에 일리가 있으며, 선한 일에 불순한 동기가, 악한 일에 순수한 동기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두 개의 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어려움을 겪습니다. 양쪽의 강점, 약점, 장점, 단점을 다 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선택의 어려움은 마음에 긴장감을 가져옵니다. (중략)
가정교회 사역에 이런 긴장감은 여기저기 존재합니다. 가정교회의 목표는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본질 회복을 외쳐도 교회가 성장하지 않으면 공허한 메아리로 그치고 맙니다. 교회의 본질이 회복되었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살아 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에 성장해야 합니다. 상치되는 것 같아 보이는 두 개의 가치, 즉 교회 본질 회복과 교회 성장 두 가지를 다 추구하자니 긴장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을 회복하는 데에도 긴장감은 존재합니다. 가정교회의 목표는 단순히 영혼을 구원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들을 제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VIP에게 전도하여 예수님을 영접시키고, 이들을 훈련시키고 양육시켜서 목자로 세워 분가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VIP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계속 일방적으로 섬겨주면 안 됩니다. 책임감과 섬김을 가르치지 않으면 영적인 어린이로 머물게 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들을 성장시키려 할 때 압박감을 느껴서 잠수를 타든지 교회를 떠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목장이나 교회를 떠나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제자가 되도록 압박감을 줄 지, 아니면 좀 더 성숙할 때를 기다리며 계속 섬겨 주어야 할 지, 두 선택 사이에서 긴장감을 맛봅니다.
성도들에게 사역을 위임할 때에도 긴장감을 맛봅니다. 에베소 4장 11~12절에 근거하여 목사와 성도가 각자 본연의 사역을 되찾도록 하는 것이 가정교회 목표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목양의 많은 부분을 위임해 줍니다. 그러나 준비가 안 된 사람들에게 목양을 맡겨 놓으면 목장 식구들이 영적으로 메말라지고 목자는 탈진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담임 목사가 끼어들어 계속 지도하고 간섭하면 목자가 홀로 서기를 못 배웁니다. 방치가 될 위험을 무릅쓰고 위임해 줄 것이냐, 아니면 간섭이 될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 줄 것이냐 사이에서 목회자는 긴장감을 맛봅니다.
동역자를 키우는 데에도 긴장감은 있습니다. 이들을 성숙한 리더로 만들려면 주도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정해주고, 그 영역 안에서 실수 하면서 배울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경험이나 역량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에게 과다한 자치권을 허용하면, 사역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실수를 통해 배우도록 전적으로 맡겨 주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실수하지 않도록 바로 잡아 주고 가르쳐야 할 것인가, 담임 목사는 이 두 선택 사이에서 긴장감을 맛봅니다.
긴장감은 스트레스를 줍니다. 이것이 싫으니까 편한 쪽을 잡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됩니다. 긴장감이 아무리 불편하다 할지라도 이를 수용하고, 균형 잡힌 결정을 내리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균형점이 어디인지, 균형 잡힌 결정이 어떤 것인지, 교과서적인 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이런 긴장감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긴장감을 수용하기로 마음만 먹어도, 바른 결정을 내리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최영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