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년을 회고해보면 목회선상에서 정말 많은 일들을 경험했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던 세월이다. 오레곤에서 부교역자로 있으면서 제일 기억에 남는 분은 이보현 목사님이다. 내가 알고 있는 목사님은 깨끗하고 정감 있는 분이다. 음악과 행사에 대한 욕심은 많으셨지만 돈이나 도덕성에 있어서는 깨끗하고 사심이 없던 청렴한 목회자이셨다. 교회 사무실에서 기거하다시피 하시면서 교회를 일으켜보려고 애를 쓰셨다. 당시는 고가품이던 프린터를 하나 사시면 내 것 까지 하나 더 사 오셔서 학교 과제물 낼 때 쓰라고 주시고 특유의 어정쩡한 표정을 짓고 나가셨다. 행정과 인쇄 작업의 달인이라서 꾸중이나 퇴짜도 많이 맞았는데 그 때 잘 배워서 지금도 목회에 도움이 될 때가 많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성은이 성준이 이름을 기억하고 아이들을 예뻐하시던 목사님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그리워진다.
텍사스에 가서 5년 동안 참 고전을 많이 했다. 첫 단독목회라서 나 자신의 경험부족도 한 몫 했고, 세상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터프한 교인들도 30대 젊은 목회자에게는 버거운 상대였다. 강해설교와 제자훈련만 건실하게 하고 도덕적인 상식만 잘 지키면 목회는 부흥할 수밖에 없다는 지나친 낙관론은 강한 현실의 한계에 부딪혔다. 평신도 시절과 부교역자 때에는 칭찬만 받고 장점만 부각되었는데 담임목사가 되니까 나의 약점이 고스란히 다 드러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나와 아내를 철저하게 훈련시키신 용광로였다는 것을 알지만 당시에는 죽고 싶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21일 장기금식까지 했을까? 달라스와 휴스턴이 멀지 않기 때문에 그 때에도 가정교회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지만 별로 관심이 없었다. 아직 좋은 것을 담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였나 보다.
재정적인 어려움, 이민 신분의 불안함, 인간관계에서 받은 상처와 불신 등으로 나와 아내는 몸과 맘이 탈진하게 되었다. 2006년 어느 날 아침 기도 중에 하나님의 훈련이 다 끝났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다음 임지가 정해지고 나서 사임을 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먼저 사임하고 큰 이모가 계신 시애틀로 무작정 상경을 결정했다. 가족들을 위해 좀처럼 갖기 어려운 미국 동부 여행을 계획했다. 작은 이모가 계신 아틀란타를 거쳐, 신학교 동기 목사님이 있는 네쉬빌을 들르고 D.C와 뉴욕, 보스턴을 방문했다. 그리고 작은 Corolla 승용차에 4식구가 구겨 타고 시애틀까지 대륙횡단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뉴욕에 도착 했을 때 온누리성결교회 청빙위원회에서 설교하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일정을 서둘러서 시애틀에 도착한 후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통해서 우리 부부를 치유하셨다.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어느 미국 교회의 기도 모임을 통해서 ‘그동안 사역하며 받았던 상처들은 새로운 목회지에서 사역하다가 치유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위로를 받았다. 그 예언대로 우리 가족은 온누리성결교회에 와서 놀라운 복을 누리고 있다. 오레곤에 다시 와서 목회하면서 어려운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와 한계점들로 인해 건강한 신약교회를 더 사모하게 되었고 결국 2013년 2개월의 안식년을 통해 가정교회를 발견하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 목회 인생에 주신 가장 큰 은혜요 선물이다. 비록 속도는 더디지만 영혼구원의 목표를 발견한 우리 공동체는 이 시대 최고의 은혜와 복을 누리고 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