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세겹줄 기도회 (6) 팀 켈러, [내가 만든 신] 6장- 문화와 종교 (은혜 없는 복음은 ‘가짜 하나님’을 만든다) 요나 2:1-10 오늘은 세겹줄 여섯 번째 날입니다. [내가 만든 신] 제6장에서 다루는 우상은 ‘문화와 종교’입니다. 지금까지는 개인적인 우상을 다루었다면, 이번 장에서는 집단적인 우상을 다룹니다. 과거에 우리가 ‘우상이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다, 탐심이다’ 이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사실 우상이란 것이 견고한 진과 같이 우리 삶에 복잡하게 얽혀있고 복합적인 구조로 달라붙어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p.199) “우상에는 개인적 형태만 있는 게 아니라 집단적이고 구조적인 형태도 있다. 특정한 우상에 대한 집착을 정상으로 여기는 사회에 완전히 파묻혀 있으면 그 우상의 실체를 분간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비록 개인적인 우상을 제거했다고 하더라도, 문화적인 우상, 종교적인 우상이 여전히 남아있어서 좋아지다가 다시 되돌아가는 일이 벌어집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요나 였습니다. 요나에게는 3가지 우상이 있었습니다. 1) 개인적인 우상으로 성공의 우상이 있었습니다. ‘회개하지도 않을 이방인 나라에 가서 예언을 했다가 빗나가면 얼마나 망신인가?’ 이런 인간적인 교만이 있어서 사명을 거부했습니다. 2) 문화적 우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지나친 애국심과 선민의식이 적국에 대한 적개심으로 작용했습니다. 3) 종교적 우상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구원 대상이 아니라는 자신의 유대교적 신학사상이 바로 우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니느웨 선교를 거부하고 반대방향 다시스로 도망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3일 동안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고백한 것이 오늘 2장 말씀입니다. 그 내용은 한 마디로 자신의 개인적 우상인 교만, 성공의 우상을 깨뜨리는 회개의 고백입니다. (요나서 2:8-9)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여기서 요나의 우상이 모두 깨어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에 순종하는 변화된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4장으로 넘어가면,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이방민족을 사랑하지 않고 그들의 구원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석연치 않은 요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주위에도 고난을 당할 때에는 겸손해지고 기도도 하고 은혜 받았다고 간증까지 하고 나서, 얼마 있다가 다시 형편이 좋아지면 180도 변해서 싸늘한 태도와 교만한 태도로 믿음의 퇴보를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상당히 실망스럽습니다. 그리고 혼돈스럽죠? ‘그럼 그 때 받은 은혜는 뭐였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요나를 보니까 이해가 갑니다. 우상이 단순하게 하나만 있는게 아니라, 복합 우상들로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무너졌지만 여전히 다른 것들이 세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p.216) “요나가 경종을 울려 주듯이 인간의 마음은 심지어 하나님께 직접 지도를 받아도 결코 빨리 변하거나 쉽게 변하지 않는다.” 4장에서 자신이 복음을 전해놓고 나서도 막상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니느웨 사람들을 보면서 선지자라는 자가 쏟아내는 말은 매우 경악스럽습니다. (p.215) “마침내 요나의 동기가 속속들이 다 드러난다. 그가 따지는 말을 보라. ‘이럴 줄 알았습니다. 주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라 속히 용서하시고 어떻게든 구원하려 하시며 끝없이 인내하시는 줄을 제가 알았습니다. 그래서 못 믿을 분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p.216) “마침내 요나의 우상이 탄로 났고, 이 나라와 민족을 혐오하는 그의 속마음이 드러났다. 요나에게서 배우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p.218) “우상은 우리의 사고만 아니라 감정까지도 뒤틀어 놓는다.” “그가 늘어놓는 궤변은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니다. 하나님이 긍휼과 사랑과 인내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그가 어떻게 격노할 수 있단 말인가?” 우상이 공격하는 우리들의 감정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장악합니다. (p.222 요약) 과거를 공격하면 ‘죄책감’에 빠진다. 미래를 공격하면 ‘두려움’과 ‘불안’에 빠진다. 현재를 공격하면 ‘분노’와 ‘절망’으로 몸부림치게 된다. (p.218)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와 긍휼은 누가 보기에도 선한 것이다. 그런데 우상 숭배 때문에 민족의 세력과 위상이 궁극적인 선이 되면 거기에 방해되는 것은 당연히 다 악으로 변한다.”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에서 새벽부터 나와서 일한 일군들이 마지막 순간에 나온 일군들에게도 동일하게 보수를 주신 주인의 너그러움에 대해서 화를 냈던 것과 비슷합니다. 그 때 포도원 주인도 비슷하게 책망하며 질문했습니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오?” 요나가 이렇게 까지 된 것은 민족적 우월감과 종교적 우월감이란 우상 때문이었습니다. 요나서의 마지막 장면은 하나님께서 박 넝쿨 그늘 때문에 혈기 부리는 요나에게 질문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요나서 4:10-11)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그리고 요나의 대답이나 그 이후의 결과는 나오지 않습니다. 저자는 요나가 당연히 회개하고 나머지 문화적 우상, 종교적 우상까지 깨뜨렸을 것으로 봅니다. (p.226-227) “어떻게 아는가? 요나가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이 이야기를 알겠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심중 깊이 파고들지 않고서야 그 누가 자신이 시종일관 악한 바보로 등장하는 이야기를 공개하겠는가?” 저자는 요나의 반응이 나오지 않는 이유를 또한 이렇게 설명합니다. (p.227) “마치 하나님이 사랑의 책망이라는 화살을 요나의 심장에 겨누어 쏘셨는데 돌연 요나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우리가 서 있는 것 같다. 질문은 바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가 요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어떻게 우리는 마지막 남은 문화적 우상과 신앙적 우상까지도 깨뜨릴 수 있을까요? (결론과 적용은 내일 마지막 장에 나옵니다). 풍랑 만난 순간에 제자들에게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의 엄중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요나 대신 우리가 대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