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교육전도사라는 직함을 갖고 목회의 길에 들어선 것이 1993년이니까 부족하나마 26년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마땅히 할 직업이 없어서 목회자가 된 것은 결코 아니고, 고등학생일 때 금요철야 기도를 하다가 영혼에 대한 긍휼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calling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기도 중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에 대성통곡을 하면서 ‘제가 그 영혼들을 위해서 삶을 드리겠다’고 서원을 했습니다. 나중에 성경을 읽다보니 마태복음 12장과 이사야서 42장에 나오는 말씀이었습니다. 목회를 하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영혼을 구원해서 그 사람이 또한 복음을 전파하는 제자로 세우는 일입니다.
그러나 목회의 현실은 성경의 이상(理想)과 많이 달랐습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으로 최선을 다하는데 전도가 잘 안되고 또 교회 나오는 신자들도 쉽게 성장하거나 변화되지 못합니다. 천국을 이 땅에 이룩하는 사명을 받은 교회가 사도행전 같은 확장과 부흥은 경험하지 못하고, 오히려 내홍을 겪기 일쑤입니다. 사회에서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는커녕 비신자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목회자는 목회도중 상처와 패배감에 빠져 자기방어적이 되고, 성도들은 영적 리더들에 대해서 실망하여 불신감과 부정적 관점에 고착되고 신앙정체에 빠지고 맙니다. 도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제 짧은 소견은 이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세속화와 유물론의 영향에 잠식된 것입니다. 성경적 신앙은 영생을 위한 것인데 세속화로 인해서 ’종교를 이익의 수단‘으로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과학만능주의와 유물론의 교만으로 인해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해독제는 사도행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신앙의 핵심은 영혼구원의 사명이다! 이 사명의 수행을 위해서는 성령님의 능력이 필요하다!” 간단명료한 해법입니다. 평신도가 목양을 경험할 때 이기적인 신앙관에서 이타적인 신앙관으로 놀랍게 변화합니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전통적인 목회방식이 그런대로 일하였습니다만, 21세기에는 ’정보화, 다원화‘되는 문화 속에서 절대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더 적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의 가장 큰 위협은 이슬람교가 아니라 “무신론”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와 목회는 달라져야 합니다. ’성직자 중심, 교리중심, 교단중심‘의 교회는 점점 쇠퇴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는 사도행전적인 신앙관과 교회관이 필요합니다. “평신도들이 삶에서 보여주는 복음, 그리고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능력과 역사(役事)”를 회복해야만 합니다.
신학교와 선배 목회자들이 좀 일찍 이런 방향을 알려주고 실제적인 현장의 노하우들을 보여주었다면, 저는 많은 시간을 비효율적인 목회방법에 허송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목회자들이 그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방식에 익숙하여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선배 목회자들 흉내나 내려는 것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다행히 저는 가정교회와 성령은사 사역을 뒤늦게나마 발견하게 되어서 너무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가정교회와 성령사역은 서로 잘 조화를 이룹니다. 평신도 목양은 자기를 비우면서 성숙하는 것이고, 성령은사 사역은 그 비운 마음에 능력을 채워서 주어진 사명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