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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칼럼 -
제목평세와 건축에 임하는 우리들의 마음 가짐2024-05-13 20:41
작성자user icon Level 10

목요일 누가복음 강해 설교 내용입니다.
평세 호스팅을 앞두고 또 건축을 한 창 진행하면서 모든 교우들이 함께 나누면 좋을 것 같아 정리해서 올려드립니다.

(누가복음 10:38-42)
10:38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10:39 이 여자에게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10:40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10:41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10:42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누가복음 강해 31
"사역과 사랑" (눅 10:38-42)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주님께서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의무적인 종교와 사마리아인의 사랑을 비교하셨습니다.

이어지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의 이야기도 연장선 상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 신앙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베다니에 살고 있던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 이렇게 세 남매는 예수님과 특별히 친한 관계였습니다.
그 날도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마을에 오시자 제일 먼저 자기 집으로 초대를 하였고, 즉흥 잔치를 열었습니다.
일단 제자들 숫자만 해도 적은 식수(食數)는 아니었고 아마도 이웃들도 초대되어 식사 인원은 제법 커졌을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준비되었던 행사는 아닌듯하니, 아무리 솜씨 좋은 큰 언니 마르다였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급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가을 추수 때에는 부지깽이도 덤벙인다’는 속담처럼, 아주 바쁠 때는 한 사람의 일손이 아주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눈치 없는 여동생 마리아는 언니의 일손을 돕지 못하고 철딱서니 없게 예수님 발 곁에 앉아서 말씀만 듣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언니 마르다가 좀 속이 상했습니다.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얄미워 죽겠어' 이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참다 못해 마르다는 볼멘 소리로 예수님께 와서 말합니다.
(현대어 성경으로)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보시고도 왜 가만히 계십니까? 어서 저를 도와주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자 여기서 여러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마르다가 속 좁은 사람입니까? 마리아가 눈치 없는 사람입니까?
-마르다는 신앙보다 일중심적이고, 마리아는 관계중심적 신앙입니까?

여러분이 그 집의 식구였다면, 부엌으로 달려갔을까요 아니면 말씀들으러 거실로 갔을까요?
만일 여러분이 주님 입장이었다면 누구 편을 들었을까요?

일단 주님께서는 마르다를 나무라거나 마리아 편만 들지는 않으셨습니다.
(41절)에서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신 것은 다정함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의 섬김과 헌신의 행위가 잘못된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선택 역시 올바른 것이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의 교회생활에서 봉사와 섬김의 사역은 불필요하고, 말씀을 전하고 듣는 예배만 중요하다고 결론내릴 수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늘 스토리의 교훈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결론은 문맥상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와 상충됩니다.
왜냐하면 레위인, 제사장은 예배를 위해서 이웃을 살리는 섬김과 봉사를 외면했고 주님의 책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교회에서 모든 교인들이 예배드리고 말씀만 들으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누군가는 예배실 에어콘도 켜고, 정리도 하고, 차량봉사도 하고, 주보도 만들고, 안내도 서고, 친교 음식도 준비하고, 음향과 영상을 조정합니다. 그런 봉사가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예배자들이 예배에만 집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봉사하기로 선택한 것이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1) 사역을 사랑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 점입니다.
(40절) 마르다가 분주했던 그 ‘일’이 그리스어로 diakonia인데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인 ‘일’이란 뜻보다 ‘사역’(ministry)라는 뜻으로 더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나중에 집사(deacon)의 어원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모든 헌신이 ‘사역’이 되면 안 되고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처음에는 영혼 사랑과 하나님 사랑의 마음으로 시작했어도 같은 일을 오래 반복하다보면 나중에는 그것이 사역이 되고 무감각한 일이 되어 버리곤 합니다.

*[마르다의 세상에서 마리아의 마음 갖기]라는 책을 쓴 ‘조안나 위버’라는 여자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목회자의 부인인데, 젊은 시절 남편이 부목사로 사역할 때의 일입니다.
주일학교 교육과 교회 음악 사역에 헌신하면서 너무나 많은 일들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해도 해도 일은 끝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미처 다 끝내지 못한 사역들을 생각할 때마다 걱정하면서 잠자리에 들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이 사모님은 탈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남편은 무슨 일이 있느냐고 흐느끼는 아내를 위로했습니다. 그 사모님은 울면서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내게 복음에 대해서 말해줘요. 기억이 안 나요. 진심이에요. 복음에 대해서 말해줘요...”

2) 마르다는 사역의 미완성을 염려해서 화를 낸 점입니다.
마르다가 마르다를 얄밉게 본 이유는 잔치 음식을 더 완성도 있게 차리고 싶은 욕구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자라면 대부분 요리에 대해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가정교회도 처음 시작할 때, 목녀님들이 제일 힘들어했던 부분이 그것입니다.
'음식은 간소하게 하라고 하지만 낯 뜨겁게 어떻게 대충 차려놓고 손님을 맞이하느냐? 남자들은 모르는 소리 좀 고만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매주 손님을 맞이하려고 해보세요. 금방 탈진하고 맙니다.
그러나 가족이라면 매일 상을 차립니다. 심지어 하루에 세 번 음식을 대접합니다. 그게 가능한게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사역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근심과 분노로부터 자유해야하는 그렇게 되려면, 나의 기준치를 낮추어야 합니다.

그날 마르다의 잔치 현장으로 돌아가 보면, 마르다는 10가지 요리를 손님들에게 내놓고 싶었다고 합시다. 본인이 좀 더 땀을 흘리고 마리아까지 도와주었다면 그 목표를 완수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부엌에 와서 도와주는 사람이 적어서 그날 마르다는 6가지의 요리만 완성해서 손님들을 대접했다고 해봅시다.
그 잔치가 크게 문제가 되었을까요?

사실 사람들은 그날 10가지 요리가 나오는지, 6가지 요리가 나오는지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잘 모릅니다.
그러나 마르다 혼자 스트레스 받고, 도와주지 않는 사람 꼴보기 싫고해서 그 불편한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금방 눈에 띕니다.
손님을 초대해놓고 주인이 인상 박박 쓰고 있으면 금방 티나죠.

*목장 하는날 목자하고 목녀가 대판 소리지르고 싸우면, 목장할 때 분위기가 왠지 어색하고 썰렁함을 숨길 수 없겠죠.
만일 눈치 없는 목원이 ‘목녀님 목이 왜 그렇게 쉬셨어요? 저희 때문에 기도 너무 많이 하셨나봐요?’
그러면 목녀가 갑자기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하고 분위기가 난해해지면서, 그날은 목장 파토가 나든지 아니면 모든 부부 관계 힐링의 시간이 되겠죠?

3) 마르다의 부족한 점 또 한 가지는, 적극적인 대화의 스킬이었습니다.
먼저는 ‘마리아가 도와주면 좀 더 음식 준비가 잘 되니까 좋고, 만일 못 도와주면 마리아가 은혜받으니까 좋고’
이렇게 마음의 룸이 마르다에게 있어야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께 찾아가서 볼멘소리로 항의할 것이 아니라, 마리아 당사자에게 가서 ‘언니 좀 도와줄 수 있어? 만일에 말씀 듣는게 너무 좋으면 꼭 도와줘야야 되는 거는 아냐?’

이렇게 온유하면서도 분명하게 무엇을 얼마만큼 원하는지 대화를 했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부엌에서 봉사할지 거실에서 말씀을 들을지 마리아가 선택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둘 다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먼저 분명하게 자기 아쉬움을 말하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가서 감정이 폭발할 때 가서야 섭섭함을 토로하곤 합니다.

오늘 스토리의 결론을 '봉사는 중요치 않다'고 내리면 안 됩니다.
‘목장에서 식사 대접하고 VIP 섬기는게 나만 너무 힘든데 그만둘까?’
이렇게 적용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아무리 귀한 사역이라도 사랑이 희미해지면 무거운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Springs Harvest Fellowship의 원로 목사이며 기독교 저술가인 더치 쉬츠 목사는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순수한 목회라도 우리가 질질 끌고 가야할 부담이 될 수 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우리가 마르다처럼 사역에 책임감 있게 헌신하고 충성하되, 마리아의 선택도 존중해줄 수 있는 사랑과 여유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크리스천 parenting 전문가요 교사인 린다 앤더슨은 이 둘의 조화를 아주 적절하게 표현해주었습니다.
“의무감으로 우리는 적절한 점심 도시락을 싸지만,
사랑이 있기에 그 안에 작은 사랑의 쪽지를 넣게 된다.
책임감이 있기에 아이들을 제시간에 잠자리로 보내지만,
사랑이 있기에 이불을 덮어주고 입맞춤하며 꼭 껴안아 준다.
책임감이 있으면 컵에 우유를 따라줄 수 있지만,
사랑이 있으면 거기에 약간의 초콜릿을 더하게 된다.”

오늘 말씀을 여러분이 헌신하고 있는 사역에 적용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녀 양육에도 적용하실 수 있습니다.

또 평신도 세미나를 준비하는 우리 교회가 어떤 마음으로 행사를 준비하고 손님을 맞이할 것인가 생각하게 해줍니다.
-음식이나 행사준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선택을 존중해주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미완성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완전하심을 신뢰하며 평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건축을 완성하는 과정에도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건물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건물보다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라면 물질도 자발적으로 헌신할 것입니다.
-물질을 헌신하지 않고 기도만 하는 분의 선택도 귀합니다.
-건축을 잘하려고 하다가 근심과 분노와 미움이 생기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최선을 다할 뿐이고 어차피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1) 사역보다 사랑에 집중하게 하옵소서!
2) 내 기준에 따라 염려하고 분노하지 말고 내 기준을 내려놓게 하옵소서!
3) 서로 온유하게 대화하며 풀어나가고 하나될 수 있는 성숙함과 지혜를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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